블로그

  • [파산일지 5화] 국세 3억 체납 신용불량자, LH 청약이라는 잔인한 바늘구멍 앞에 서다

    24살.. 어린 나이에 사장이 되어서
    20년 가까이 한 가지 길만 걸었던 저였는데,
    막상 이젠 사장이 아닌 취준생으로 다시 나가서 일할 생각을 하니 설렘도 있고 기분이 다운되기도 하고 무척 복잡미묘했습니다.

    그동안 참 많은..마음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네요.


    1. “우리는 해외 가려고…”
    파산 후 맞이하는 차가운 명절

    저의 파산으로 인해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다 보니,
    아버지께서 명절에는 모든 친척들이 모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전화를 돌리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친척분들께 많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라냐… 니가..
    괜찮아? 우리는 해외 가려고..”

    그 질문을 받는데 숨이 턱 막혔습니다.

    “안 괜찮아요..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요, 괜찮아요 저는..”

    제 입으로 당당한 척 대답을 하면서도,
    이런 모순 같은 대답을 내놓으며 또 한 번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군요.

    사실 저는 친척분들과는 연락을 잘 하지는 않는 사이입니다. 제가 사업이 잘됐을 땐

    “돈 많이 벌었다며?
    어떻게 번 거야? 같이 투자할 수 있을까?
    좋은 정보 좀 줘, 가족인데 같이 벌어야지”


    하며 연락이 오곤 했었죠.
    하지만 파산을 했다고 하니 들려오는 좀 다른,
    투명하고 차가운 목소리들…
    그냥 제 기분이 그런 걸까요?


    2. 쑥대밭이 된 의류 제조 유통업, 자영업의 지독한 굴레

    제 주위의 인맥들은 사실 직장인보단 자영업 사장님들 비율이 많습니다. 아니, 많았습니다.

    작년부터 주위에서 회생, 파산 얘기가 많이 들려왔는데 그때만 해도 제 얘기는 아니란 생각을 했었죠.

    이제는 서로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안부를 묻는 게 일상이 되었습니다. 일단 저는 의류 제조 유통업이었고, 저만 파산.. 주위 분들은 거의 회생 중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아마도 의류업은 이번 연도를 넘기기 힘든 분들이 더 많아질 것 같습니다.

    저가 의류에 밀려,
    시장 전체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거든요.


    3. 실업자카드에서
    국취제 2형으로…
    앞으로 전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앞으로 저는 제 길을 다시 묵묵히 가야겠지요.
    내일배움카드로 배우는 훈련 과정의 수료를 일주일 앞두고 어떤 훈련을 더 배워야 할까 고민이 많던 찰나에, 시청 복지과 직원분과 통화를 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기초생활수급자 중에서도
    ‘조건부 생계급여’를 받게 되는 입장이라,

    실업자카드에서
    [국취제 2형]으로 카드를 바꿔야 하고,
    진로 상담이 필요하다 하셔서, 센터로 오라고 하시더군요. 어떤 것을 배울 생각인지 앞으로 무얼 할 계획인지 구체적인 계획서서 세워서 오라고 하시면서요.

    글쎄요..
    전 앞으로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루에도 제 기분은 몇십 번은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어느 분은 제게
    “파산은 용기 있는 자가 하는 것”
    이라고 합니다.

    어느 분은 제게
    “파산을 하면, 거지처럼 살아야 한다”
    고 합니다.


    이 말을 듣는 저는 기분이 좋을 땐

    ‘아, 나는 용기가 있는 건가?’ 싶다가도,
    기분이 나쁠 땐 ‘아, 깡이 좋은 건가?
    나 거지처럼 살아야 되는 건가?’ 하며

    멘탈이 사정없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아직 뭘 해야 할지 제 스스로도 감을 못 잡은 것 같습니다.


    4. 20년의 경력이
    서류 몇 장으로 정리되던 날

    제가 알바를 하든, 직원으로 취업을 하게 될지 아직 저도 저를 잘 모릅니다.

    어쩌면 이런 경기에, 이 나이엔 진로상담가의 말대로 실패를 해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2026년 2월부터 변호사며, 법무사며,
    지인들 소개부터 네이버 뒤져가며 회생을 택해야 하는지 파산을 택해야 하는지 수소문하고..

    ‘그래.. 오늘의 실패가, 날 다시 일어나게 할 거야.’
    그렇게 다짐도 해보고요.


    5. 오직 아이들과 살기 위한 LH 아파트, 그 처참하고 잔인한 조건들

    오직 아이들과 살기 위해,
    마지막 동아줄인 LH 임대아파트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지만 그 조건 역시 너무나 처참했습니다.

    기초수급자여야 하고, 한부모가정이어야 되고, 다자녀여야 하고, 몸까지 아파야 합니다. 자동차도 없어야 합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완벽한 바닥임을 증명해야만 겨우 1순위 자격이 주어지는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최소 5000만 원 정도는 현금으로 손에 쥐고 있어야만 LH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장 몇십만 원이 없어서 파산을 선택한 제게 5000만 원은 너무나 거대한 벽입니다.

    그 돈이 없으면, 정부가 전세 사기를 당한 집들을 매입해서 재임대해 주는 매입임대 주택으로 밀려나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곳, 내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환경은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사는 경기도엔 총 22군데의 GH매입임대가 있는데, 그중엔 제가 사는 지역만 해도 신청자가 16명입니다.

    그들 전부가 저와 같은 기초수급자라고 합니다.
    아주 희박한 확률을 뚫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지독한 바늘구멍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6. 49대 1의 경쟁률,
    로또 같은 보금자리를 기다리며

    이번엔 하늘을 보며 소원 하나 빌어도 될까요?

    서류 제출 대상자가 된 LH 청약이
    무려 49:1의 경쟁률인데,
    제겐 로또 아닌 로또의 기대를 걸어봅니다.

    이 서류 지옥을 뚫고 무사히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요새 힘들다는 사장님들의 댓글을 많이 봤는데,
    저처럼 다 무너지고 파산한 사람도
    어떻게든 숨 쉬며 살아지긴 합니다.

    그러니 다들 힘내시고,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는데 감기 조심하세요.

    우리 다 같이 기운 내서 살아남읍시다.
    화이팅입니다!

  • [파산일지 4화] 연 매출 70억 디자이너의 시작, 비행기 표 한 장 들고 중국으로 향했던 이유

    많은 분들이 물어보셨습니다.
    디자이너 출신으로 어떻게 하반기 매출만
    70억 원을 찍는 공장장까지 되었냐고 말이죠.

    그 화려했던 모든 시작은,
    맨땅에 헤딩하듯 비행기 표 한 장 쥔 채
    가난한 현실로부터 도망치듯 중국 대륙으로 건너갔던 2007년, 24살의 그날부터였습니다.

    “땅! 땅! 땅! 파산을 허가한다.”

    2026년 현재의 저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뒤뚱뒤뚱 보행자에,
    나라에서 지정한 기초생활수급자이자 두 아이를 혼자 키우는 한 부모 가장입니다.

    몰락한 저를 보며 아버지는



    “쓸모없는 놈,
    미싱 공장이나 들어가서 옷이나 박아라”라며
    모진 말을 뱉으셨죠.
    (딸임에도 저는 늘 ‘년’이 아닌 ‘놈’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때 저는 동대문 시장 바닥에서


    “언니, 니하오 언니! 신콴(신상품) 있어요!”

    를 외치며 손짓 발짓으로 중국 바이어들을 사로잡던
    독한 판매자이자 디자이너였습니다.

    독기의 시작은,
    고작 월급 80만 원을 받던 지독한
    ‘막내 디자이너’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 월급 80만 원, 15시간 노동…
    독기로 버틴 디자이너 막내 시절

    처음 패션 디자이너로 발을 디뎠을 때,
    저는 디자이너로 출근은 했지만, 사실은 그저
    ‘시다(보조)’와 다름없는 일이 맡겨졌습니다.

    위에 언니들이 시키는 대로 온갖 부자재와 원단을 발주하고, 원단 시장을 이 잡듯 뒤지며 필요한 자재들을 챙기는 궂은일이 제 몫이었죠.

    회사의 막내 디자이너일 뿐이었지만,
    정말 많은 월급을 받고 싶어서 참 미련할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 시절 선배들의 눈칫밥을 먹으며 무거운 원단과 지퍼 부자재, 쇠단추를 어깨에 메고 동대문 시장 골목을 뛰다 보면, 어느새 다리가 밤마다 코끼리처럼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막내 디자이너인데도 회사 매출을 올려놔야만 제게도 인센티브가 떨어지기에,

    생산 일정을 단 하루라도 앞당겨보려고 공장 사장님들을 찾아가 싹싹하게 부탁을 드렸고,

    고작 80만 원 받는 제 지갑을 털어 공장에 박카스를 사 들고 다녔습니다.

    선배 언니들의 지독한 텃세 속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 15시간 넘게 일했습니다.

    하루에 수십 가지 제품의 주문 건이 엄청났거든요.

    심지어 유일하게 쉬는 일요일에도 공장에서 급하다며 전화가 오면, 군말 없이 회사로 뛰어가 부자재실 문을 열어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온 정신과 몸을 갈아 넣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도 사장 하고 싶다.
    우리 사장님은 맨날 앉아서 돈만 세는데…’

    결국 8개월을 버틴 끝에 사장님 방 문을 두드리고…
    사표를 내게 되었습니다.

    사장님은 깜짝 놀라 왜 그만두냐고 물으셨고,
    저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당돌하게 받아쳤습니다.

    나: “사장님, 저 여기 그만두고요, 경쟁사 회사에 들어가서 일하고 싶어요. 사표 받아주세요.”

    사장님: “뭐? 무슨 소리야? 조금만 더 잘하면 우리가 1등인데, 왜 하필 경쟁사야?”

    나: “음.. 제가 경쟁사에 가서 거기 일까지 배우면, 지금 이 회사도 최고지만 제가 최고인 거는 아니잖아요. 하지만 1등 회사를 가면, 제가 최고가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저는 이미 제가 받는 최저 월급에서 주말에도 나와서 일을 하고요, 틈틈이 밤새워 한 청바지 디자인은 언니들이 홀라당 베껴서 마치 자기가 디자인한 것 마냥 컨펌을 받고 인센티브를 타가고 있어요. 그런데 회사는 눈을 감고 있잖아요. 사장님은 다 알면서도 저한테는 그저 버티라고만 하시고요.

    하지만, 그 모든 희생의 보상이 고작 몇십만 원인 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제 능력이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경쟁사까지 가서 거기 일까지 다 배우면, 전 정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사장님이 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럴려면요, 저는 그 회사에 가서, 매장에 나가 소비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들이 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서, 그 옷 내가 다 만들어주겠다고요.

    제 당돌하고도 확신에 찬 선언에
    사장님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정신이 번쩍 든 사장님은 붙잡을 명분이 없자, 제발 사표 수리를 며칠만 미뤄달라며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저 역시 무작정 도망치듯 나가고 싶진 않았기에,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는 깔끔하게 마치고 가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사장님이 다급하게 저를 사장실로 불러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장님 옆에 웬 풍채 좋은 남성 한 분이 앉아 계시더군요. 바로 사장님 와이프의 오빠, 즉 이 회사의 실질적인 뒷배이자 처남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동대문 의류 업계에서 하루 도매 매출만 1억 원이 넘는, 그야말로 판을 흔드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죠. 제 사직서를 만지작거리며 사장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듯한 그 대단한 양반이, 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빤히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툭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너, 참 당돌하다?
    너 그럼… 우리가 시키는 일 한번 제대로 해볼래?
    월급은 물론이고, 네가 파는 만큼
    인센티브를 아낌없이 줄게.”


    2. 하루 매출 2억, 검은 봉지 속 현금 뭉치… 동대문 초호황기

    그렇게 저는 막내 디자이너였음에도 불구하고,
    처남분의 픽을 받아 처음으로 동대문 도매시장이라는 거친 곳에 나가 손님들과 직접 대면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2006년의 한국 경기는
    그야말로 역대급 초호황이었습니다.

    중국, 대만, 홍콩 등 아시아계에서 중국어를 구사하는 큰손 바이어들이 한국 동대문 시장으로 몰려와 전 세계로 나갈 옷들을 그야말로 ‘싹쓸이’ 해가던
    르네상스 시절이었죠.

    바이어 한 명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2,000장, 3,000장씩 오더를 내리는 건
    일도 아니었습니다.

    매장 창구에서는 카드나 계좌이체 따위는 쓰지도 않았습니다. 전부 시커먼 검은 봉지에 순수 현금 뭉치를 가득 담아 툭툭 던져주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매장의 하루 매출은
    기본 1억에서 2억 원을 매일같이 오갔습니다.
    2006년 당시에 말이죠.

    매일 눈앞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돈의 쓰나미를 보며, 제 가슴 속엔 더 큰 세상에 대한 갈증과 야망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분에 제 나이 고작 23살(2006년)에 월급과
    인센티브를 더해 210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돈을 만지게 되었습니다.

    2026년 현재 가치로 치면 최소 500만 원에서 600만 원은 족히 되는 대기업 과장급 거금이었습니다.

    제 매장도 아닌 회사의 매장이었지만,
    그저 돈을 더 벌어서 이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독립해 보겠다고 정말 미친 듯이 질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3. “중국에 가서 중국어를 배워와” 홍콩 손님의 기묘한 제안

    그러던 어느 날, 한 홍콩 손님이 통역가를 대동하고
    제게 다가와 말을 건넸습니다.

    손님: “너 영어도 조금 할 줄 아는 것 같고, 디자이너라면서 왜 여기 나와 있어?
    똑똑해 보이는데 내가 만들어 달라는 거 만들어 줄 수 있어?

    그럼 중국에 가서 중국어를 배워서 와.
    그럼 내가 너한테 제대로 오더(주문)를 줄게. 여기 있어봤자, 쩜순이 밖에 더 하겠지?”

    *쩜순이 : 매장에서 판매하는 여자를 가리키는 은어

    처음엔 장난인가 싶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 가난한 나라에 내가 왜 가야 하지?’
    하지만 꼬리를 문 호기심은 결국 저를 움직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상하이 럭셔리 백화점의 매니저로 가 있던 아는 언니를 만나기 위해 상하이 땅을 밟았을 때,
    저는 거대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직접 마주한 상하이는
    제가 상상했던 가난한 중국이 아니었습니다.

    도로 위를 가득 채운 벤츠와 BMW,
    한국보다 훨씬 비싼 식당의 메뉴판…
    제가 한국에서 생각했던 부의 기준과 가치가 그곳엔
    널려 있었습니다.

    ‘그래, 결심했어!
    가난한 나라인 줄만 알았던 중국에는,
    내가 배워야 할 거대한 세상이 있던거야.’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사직서를 던졌습니다.
    회사에서는 연봉을 얼마든 맞춰줄 테니 붙잡았지만, 제 마음은 이미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에겐 인생을 바꿀 거대한 자영업이라는
    도박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4. 가족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멍에, 그리고 차디찬 베란다 방

    중국 의류 산업의 중심지인
    ‘광저우’의 한 대학교로 어학연수 원서를 접수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을 때,
    돌아온 건 아버지의 불호령이었습니다.

    “망할 놈의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너 이거 도피야!
    아빠는 너 대줄 돈 한 푼도 없으니까
    갈 거면 네 돈으로 가! 여자애가 가긴 어딜 가!!”

    사실 저희 집은 눈물 나게 가난했습니다.
    과거 할아버지의 지독한 도박 중독으로 집안이 부도난 후, 아버지는 중동 사막에서 노가다를 하며 피땀 흘려 돈을 벌어오셨습니다.

    하지만 고모할머니를 따라 주식판에 그 돈을 전부 쏟아부었고, 결과는 처참한 파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희 가족은 차디찬 월세방을 전전하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아버지는 가문의 마지막 남은 돈을
    5살 터울의 ‘3대 독자 오빠’에게 전부 올인하셨습니다.

    오빠의 비싼 연기학원비, 대학 등록금, 추후 안경점을 차려주는 것까지가 우리 집의 당연한 숙제이자 종교였습니다.

    반면 저에게 투자할 돈 따위는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오히려 중국으로 떠나겠다는 저에게 이사
    보증금이 모자란다며 압박을 가해왔습니다.

    “자고로 집안이 안정이 돼야
    밖에서도 편안하게 일하는 법이야.
    그러니까 이번에 네 돈 좀 쓰자.”

    결국 저는 어렵게 모아둔 어학연수 비용 500만 원을 전부 부모님께 내어드렸습니다.

    자식의 꿈을 제물로 삼아
    가족들은 무사히 이사를 마쳤죠.
    하지만 그 대가로 새집에서 제가 얻은 공간은,
    일반 화장실보다도 작은, 그저 몸뚱이 하나 겨우 누일 수 있는 ‘차디찬 베란다를 개조한 방’이었습니다.


    5. 유명 대학 앞 토크바(Talk Bar)에서 흘린 눈물과 기회

    당장 눈앞에 닥친 중국 연수 비용을 다시 모아야 했기에, 저는 눈물을 삼키며 인터넷을 뒤져 단기 알바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한 유명 대학교 바로 앞의 ‘토크바(Talk Bar)’였습니다.

    술을 마시고 웃음을 팔아야 하는 음지 같아 겁이 났지만, 절박함이 저를 이끌었습니다.

    다행히 순진하고 때 묻지 않은 제 사정을 들은 사장님은 저를 채용해 주셨고, 저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어른들에게 술을 배웠습니다.

    체질적으로 알코올 해독이 전혀 안 되는 몸이었지만
    돈을 벌어야 했기에 버텼습니다.
    매일 밤 캔커피를 돌리며 호객 행위를 했죠.

    그곳은 강남 유흥가와 달리 교수, 조교, 엘리트 동문들이 찾는 지적인 명소였습니다.

    일하는 스태프들도 전부 내로라하는 명문대생들이었죠. 그 화려한 엘리트들의 무용담 사이로,

    어느 날 제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든
    단어 하나가 날아와 꽂혔습니다.

    손님: “야, 내가 얼마 전에 중국을 다녀왔는데 미쳤다, 걔네들. 이제는 걔네가 전 세계 일등이야. 진짜 싸게 잘 만들어!”

    나: “저.. 죄송한데.. 도대체 중국이라는 나라는 왜 가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거기가 왜 일등인가요?”

    손님: “음… 한마디로, 황금알을 낳는 닭들을 잔뜩 가둬놓은 거대한 닭장이라고 해야 할까?”

    머릿속에 번개가 친 것 같았습니다.



    ‘아, 유레카…!’


    6. 24살의 방황 끝에
    드디어 나의 심장이 뜨거워지다

    원래는 딱 한 달만 일하고 중국어 학원을 다닌 뒤
    출국하려 했지만, 부모님께 드린 500만 원의 공백 때문에 저는 세 달 동안 독한 술을 삼키며 영혼을 갈아 넣어야 했습니다.

    ‘돈이 많아도
    저렇게 꼬장부리는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영혼이 닳아가던 어느 날 밤,
    해외 교포 출신 대학원생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제 전공이 패션디자인이라는 말에 한 손님이 눈을 반짝이며 결정적인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우리 집 아르헨티나에서 옷 도매상 하거든?
    근데 그 수많은 옷을 다 어디서
    떼어오는지 알아? 전부 중국이야!

    중국 가면 옷값이 진짜 말도 안 되게 싸.
    근데 품질도 나쁘지 않단 말이지.

    그냥 중국 옷이 아니라
    ‘한국 스타일 옷’을 가져와서 아르헨티나에서
    엄청나게 마진을 붙여서 파는 거야.

    우리 집 쫄딱 망해 가던 집구석이었는데,
    엄마가 그 중국 무역 시작하고
    돈을 쓸어 담았어.”

    쿵-쾅-쿵-쾅

    가난한 현실에 부딪혀 꿈을 접고 도망쳐야 할지 치열하게 방황하던 24살의 제 심장이 뜨거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하반기 70억 매출을 찍고 다시 파산을 겪은 지금까지도,

    그날 밤 그 손님이 해주었던 이야기는 제 뇌리에 문신처럼 박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한마디를 기점으로,
    자그마한 베란다에 몸을 뉘여야 했던 제 가난한 인생은 완전히 통째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5화 예고]
    천신만고 끝에 다시 어학연수비를 모아
    독기만 품고 도착한 중국 광저우.

    하지만 언어도 통하지 않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24살의 여자 디자이너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상 초월의 텃세와 거대한 사기 플랜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대륙에서 생존하며,
    ’70억 매출’의 발판을 마련했는지,
    다음 5화에서 생생한 날것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 [파산일지 3화] 파산에서 기초수급자로..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자활의 기록

    돌이켜보면 2025년 가을,
    파산 선고를 마치고 기초생활수급자 증명서를
    손에 쥐었던 그 시기는 제 인생에서
    가장 숨이 막히던 나날이었습니다.

    당장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기에, 하루 10시간씩 내일배움카드로 학원 교육을 받으며
    정신없이 지내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제 처참한 현실을 고백했던 글에
    수많은 동료 자영업자분들이 피눈물 나는 댓글과
    질문들을 남겨주셨습니다.

    “남의 일 같지 않다”,
    “법무사 사무실은 어디냐”,
    “개인회생은 왜 안 했냐” 등등…

    오늘 3화에서는
    그 시절 제가 회생과 파산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차가운 현실 벽에 부딪혔었는지
    그 못다 한 이야기를 꺼내보려 합니다.


    회생이냐 파산이냐,
    그리고 선배의 조언

    처음 빚 독촉이 몰아칠 때,
    저 역시 회생과 파산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습니다.
    서초동 일대의 법무사 사무실 서너 군데를 돌며
    전화와 방문 상담을 받았었죠.

    하지만 돌아오는 질문은 늘 똑같았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 건가요?
    당장 소득이 없으면 회생 신청 자체가 안 됩니다.
    회생했다가 결국 터져서 파산으로 넘어오는 경우도
    많으니 잘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 질문에 저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70억 매출을 찍으며 20년 동안
    의류 공장을 운영하고 화려한 디자인만 해왔던
    내가,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대체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할 수 있을지
    제 자신도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신용불량자로 5~10년은
    숨 죽이며 살아야 하는데,
    과연 재기라는 걸 할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때 동종업계 선배 한 분이
    제게 아주 독한 조언을 건넸습니다.

    “파산하면 처음에 정말 많이 힘들어.
    한강 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고
    물만 보면 뛰어내리고 싶을 거야.
    그런데 막상 겪어보면 또 해볼 만해.
    한번 파산해 보면 너무 아파서,
    그 뒤론 다신 그렇게 안 살려고 스스로를
    철저하게 옭아매거든.
    너 아직 40대 초반이잖아?
    내 기준에 파산은, 나를 다시 일어나게 한
    결정적인 계기였어.”

    그 말을 듣는데 화도 나고 겁도 났습니다.
    울컥하는 마음에 순간 진짜 한강으로 가볼까
    생각도 했습니다.


    한강이 아닌
    컴퓨터 앞으로 저를 돌려세운 기억

    그 절망의 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제 사촌동생이 떠올랐습니다.

    제 동생은
    저와 나이터울이 얼마 안 나는 현직 경찰입니다.

    몇 년 전, 동생이 목숨을 걸고 한강에 뛰어들어
    한 자살 시도자를 구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경찰서에 찾아온 그분의 가족들은 고맙다는 말 대신 동생에게 대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그냥 죽게 냅두지 왜 구했냐,
    지금 몇 번째 이러는 줄 아냐, 우리도 힘들어 죽겠다…”

    자기도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며 구했는데
    그런 모진 말을 들은 동생은 트라우마가 생겨
    한동안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벼랑 끝에서 그 동생의 아픈 모습이 문득 겹치더군요.

    ‘나는 절대로 저러지 말아야지.
    주위에 피해 주지 말고 내 힘으로
    어떻게든 이겨내야지…’

    마음을 가까스로 다잡고 다시 컴퓨터를 켰습니다.
    고용24 사이트에 들어가 내 상황에 맞는
    국비 지원 수업들을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부모에 나이도 걸리구요…
    ” 인력개발센터에서 펑펑 운 날

    어떻게든 살길을 찾으려고
    집 근처 인력개발센터를 찾아갔던 날이 있었습니다.

    고용24를 통해 무역업과 온라인 실무 쪽으로
    이력서도 미리 넣어둔 상태였죠.

    하지만 그날 저는 비참한 거절감을 맛보고
    하루 종일 울어야 했습니다.

    앞으로 파산이나 자활을 준비하시는 사장님들도
    언젠가 마주할지 모르는 차가운 현실입니다.

    나:
    “일자리를 찾아보려고 왔는데
    교육 신청이 가능할까요?”

    센터 직원:
    “나이랑 그동안 하셨던 일을 보니…
    죄송하지만 수업 참여가 어려우실 것 같아요.”

    나:
    “왜요? 수업도 마음대로 참여를 못 하나요?”

    센터 직원:
    “연계된 업체들이 대부분 최저시급 기준이라
    사장님이 원하시는 기준(월 200만 원 선)으로는
    취업 매칭이 안 됩니다.
    그리고 사실… 한부모이시기도 하고,
    나이도 좀 걸리시구요.
    다른 분들께 기회가 먼저 갑니다.
    다음 분 기다리시니 여기까지만 얘기할게요.”

    20년간 디자이너 출신으로
    공장까지 책임지던 제가,
    나이와 한부모라는 제한에 걸려 면접조차
    제대로 못 보고 문전박대를 당한 것입니다.

    직원은 은근히 저에게
    쿠팡 물류센터 알바나 배달 일을 권하더군요.

    사실 저는 3년 전 거래처 배송을 가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해 복강내출혈로 다리를 절고 있었습니다.

    서서 일하는 직업을 가지려면 다리 치료부터 받아야
    하고, 치료를 받으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 악순환이었지만, 나라의 시스템은 제 개인의 절박한 사정을 눈여겨봐 주지 않았습니다.

    인력개발센터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습니다.

    그 꼴로 차마 버스나 전철을 탈 수가 없어서,
    눈물에 젖은 물티슈를 꽉 짜내며
    아픈 다리를 이끌고 네 정거장 거리를
    혼자 펑펑 울며 걸어왔습니다.

    남들에게 말도 못 할 지독한 패배감과
    고독이 온몸을 짓누르던 순간이었습니다.


    밤을 새우며 다시 짠 시간표,
    그리고 터닝포인트

    집에 오자마자 세수를 하고
    얼음으로 퉁퉁 부은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다시 독기를 품었습니다.

    ‘그래, 누굴 탓하겠냐. 아파도 내가 이겨내야지.’

    그날 밤 컴퓨터를 켜고 밤새 고용24 사이트를 뒤져
    시간표를 다시 짜기 시작했습니다.

    1년 동안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워보자는 마음에
    경비가 적게 들면서도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하든
    무기가 될 수 있는 교육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때 선택해서 가장 먼저 배웠던 것이 바로
    [유튜브 교육 + SNS 온라인 실무 마케팅]이었습니다.

    과거에 공장을 할 때는 브랜드 오더 맞추고
    원단 발주하느라 바빠서

    ‘공장만 잘 돌리면 되지, 인플루언서 마케팅은 무슨’

    참..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혼자 법원에 다니며 외상대금 받아낼 줄만 알았지,
    세상 트렌드가 변하는 걸 몰랐던 거죠.

    하지만 그때 마케팅과 브랜딩의 중요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밥 한 번 못 해준
    미안함에 한식·중식·양식·베이커리 제조 기술까지
    악착같이 배우려고 합니다.

    주위 동종업계 선배들은

    “다 배우면 나도 알려달라”며 웃었지만,
    속으로는 참 씁쓸하면서도

    ‘반드시 다시 일어서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죠.

    그때 그 시절,
    비 내리는 토요일 공원 의자에 앉아

    ‘내 인생은 새드엔딩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해피엔딩(Happy Anding)일 거야’

    라고 믿으면서 말이죠.


    2026년 현재,
    그 시절을 돌아보며

    당시 새벽 5시 31분에 절망을
    꾹꾹 눌러 담아 썼던 그 글로부터 벌써 10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 2026년 현재,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약속대로 저는 그 시절 배운 유튜브와
    온라인 마케팅 기술을 밑거름 삼아,

    수급자를 당당히 탈출하기위해,
    부활하는 과정을 밟아가고 있습니다.

    벼랑 끝에서 흘린 피눈물과
    시간표가 결국 제 인생의 가장 강력한
    터닝포인트가 된 셈입니다.

    당시 제가 길을 잃고 헤매던 초기에,
    다른 광고성 업체들과 달리 제 복잡한 사정과
    억울한 사기 피해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개인파산 면책 후 수급자 연계’라는
    정확한 법적 돌파구를 찾아주신 법무사님과
    담당 과장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30가지 서류 지옥을 뚫고
    압류방지 통장까지 만들며 무사히 버텨낼 수 있었죠.

    

    지금 이 순간에도
    회생과 파산의 기로에서
    길을 못 찾고 계시거나,

    나이와 차가운 현실의
    벽에 막혀 혼자 눈물 흘리는
    자영업자 사장님들이 정말 많으실 겁니다.

    절대 혼자 끙끙 앓지 마세요.
    밑바닥에서도 솟아날 구멍은 분명히 있습니다.
    절대 기죽지 마시고 화이팅입니다!


  • [파산일지 2화] 파산선고가 나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습니다


    지난 파산일지 1화에서는 법원 문을 나서며
    홀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눈물 흘리던 기억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날 이후 제 인생에는
    또 한 번의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나라에서 지정한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것입니다.

    당시 법원에서 돌아와 마주한 카페의
    수많은 응원 댓글들을 읽으며
    참 복잡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의 무거움 속에서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을 겨우 붙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나를 숨 막히게 했던 30가지 법원 제출 서류들

    많은 분들이 도대체 파산 신청을 할 때
    어떤 서류들이 필요하냐고 물어보십니다.

    법원과 법무사무소에서 저에게 요구했던 서류는
    자그마치 30가지가 넘었습니다.

    구청, 주민센터, 보건소, 은행,
    그리고 제가 지난 2~3년 동안 거래했던
    모든 은행의 통장 내역서까지…

    내 모든 삶의 흔적과 실패의 기록을
    샅샅이 파헤쳐서 법원에 제출해야 했기에,
    이 서류들을 하나하나 발급받으러 돌아다닐 때의
    비참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서류들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법무사무소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 현재 소득과 재산 상태를 조회해 보더니,
    제가 ‘기초생활수급자’ 조건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더군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나름 70억 매출을 내던 패션 디자이너였고
    자영업자로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내가..

    나라의 보조를 받아야 하는 수급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지독했던 자영업의 굴레를 벗어나 마주한 현실은,
    내 이름 뒤에 ‘기초수급자’라는
    다섯 글자가 붙는 것이었습니다.


    조양방직 카페에서
    마주한 나의 가장 큰 약점

    씁쓸한 마음을 달래러 찾아갔던
    조양방직 카페 내에는 마치
    ‘응답하라 1988’처럼 역사가 담긴
    오래된 제품들이 즐비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가만히 둘러보는데,
    3대 정도로 보이는 가족들이 하하호호 웃으시며
    과거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더군요.

    “참 가난했었다…”

    하시는 어르신의 말씀이 지나가면서 들려오는데,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문득 제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방학 때마다 부모님이 너무 바쁘셔서
    저 혼자 항상 시골 할머니댁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때 시골 방안에 걸려있던 흑백 가족사진들…

    “오늘날 카페에서 비슷한
    흑백 사진들을 보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며 펑펑 났습니다.

    아무래도 저의 가장 큰 약점은
    ‘가족’인가 봅니다.”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가장으로서,
    내 아이들에게 이 가난의 무게를 지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울컥 올라와 눈물을 참느라
    참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가장 많이 물어보시는
    파산 관련 Q&A

    당시 카페 사장님들이 가장 많이 질문해 주셨고,
    지금도 파산을 고민하는 많은 자영업자분들이
    궁금해하시는 현실적인 의문들에 대해
    제가 아는 선에서 답을 정리해 드립니다.

    Q1. 파산 신청하면 카드는 어떻게 사용하며 지내나요?

    저는 파산으로 인해 ‘긴급생계 대상자’가 되어
    두 달 동안 나라에서 지원금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한 법적 서류들을
    토대로 위기 상황이 인정되었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가장이라
    주민센터 복지과에서 새마을금고
    [행복지킴이 압류방지 통장]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이 통장과 연결된 카드는 계좌이체도 안 되고,
    오직 정부지원금 현금인출만 되게
    해놓은 카드였습니다.

    이것으로 두 달 동안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Q2. 앞으로의 생계 계획과 자활은 어떻게 되나요?

    ‘생계수당’이라고 해서, 직업 훈련을 받는 동안
    나라에서 수당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냥 주는 것은 아니고 관내와 이어진 사업체
    (카페 근무, 편의점, 공방 제작,
    플라스틱 사출, 청소 등)
    에서 일을 해야 하며 업종과 근무시간에 따라

    약 50~150만 원 사이의 급여를 받게 됩니다.

    제가 앞으로 어떤 일을 배정받아
    하게 될지는 아직 모릅니다.

    우선은 훈련을 받으면서,
    그동안 마음의 병이 되었던 우울증과 공황장애
    치료부터 병행하게 될 것 같습니다.

    Q3. 파산하면 기존의 빚은 어떻게 처리되나요?

    제 명의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기에,
    이는 공매로 처분하게 되었습니다.

    아파트를 매도함으로써 나오는 금액으로
    국세를 제외한 나머지 일반 빚들은
    어느 정도 탕감이 됩니다.
    (대출 규제 때문에 2년 동안 안 팔리던
    아파트가 결국 이렇게 처분되더군요.)

    단, 국세는 평생 갚아야 합니다.

    앞으로 일을 해서 월급을 받으면 기본 생계비를
    제외한 금액은 전부 못 냈던 국세로 빠져나갑니다.

    심지어 예전에 외상대금 안 주고
    도망간 쓰레기 같은 놈을 잡아서
    돈을 돌려받는다고 해도,

    그 돈 역시 전부 국세로 최우선 변제됩니다.

    빚이 탕감된다고 해서 모든 책임이
    완전히 제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 10개월이 지난 지금,
    자활을 준비하며

    당시 글을 마칠 때 저는 새벽에 이렇게 적었더군요.
    “다음에 글을 쓰게 된다면..
    어쩌면 자활 과정의 글들이 되겠네요.”

    이 글을 쓰고 10개월이 흐른 지금,
    저는 그 약속대로
    진짜 ‘자활과 부활’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습니다.

    파산과 기초수급자라는 타이틀이 처음엔 낙인처럼
    아팠지만, 오히려 저를 죈 지독한 사슬을
    끊어주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인생의 아침 글을 읽으시며
    힘든 하루를 버텨내고 계실 수많은 사장님들.

    밑바닥에서도 길은 있습니다.
    오늘도 힘내시고,
    다 같이 기운 내서 화이팅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파산일지 1화] 파산선고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날의 기록


    지금으로부터 약 10개월 전인
    2025년 9월 9일.

    법원에서 파산선고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스마트폰을 켜고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꾹꾹 눌러썼던 글입니다.

    당시의 비참함과 절망,
    그리고 다짐을 잊지 않기 위해
    그때의 기록을 날것 그대로 꺼내어 봅니다.

    당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인생 뭐 같다’ 라는 생각과..
    ‘나는 그래도 나름 청년이더라..’
    하는 서글픈 생각이 교차했지요.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의 무거움과,
    법정에서 나눠준 서류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법정에서 마주한
    100여 명의 무거운 사연들

    그날 법정에서는 총 100분 정도 되는 분들이
    순차적으로 호명되었습니다.

    제 차례가 불러지며 서류를 받는데,
    평상시라면 나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받을 땐
    별 생각이 없다가 법정안에서 받는 서류는
    뭔가 마음의 묵직함을 주더군요.

    법정에 나오신 변호사님은 상황에 따라
    파산선고를 받는 분들의 질의응답에 때론 매몰차게,
    때론 따스하게 답해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질의응답 분위기상..
    저는 그곳에서 최연소였던지라;;
    변호사님도 제 얼굴을 보며 놀라시고,
    “잘 해결되기 바란다”며
    따뜻한 말을 건네주셨습니다.

    전반적으로 50대 후반~60대 분들이
    30% 정도였고, 제 기준에는 어머니 아버지
    되는 분들의 연세가 특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분들도 각자의 사연을 갖고 여기까지
    나오셨을 텐데, 얼굴은 상하셨고 몸도 많이
    쇠약해 보이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투명 핸드폰 케이스 속,
    아이들의 증명사진

    사실 제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들 각자 불안한 마음에
    뭐라도 잡고 계셨는데, 그게 거의 핸드폰이었습니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어르신들의 핸드폰 투명 케이스 안쪽에는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자녀들의 증명사진이 빛바랜 채 꽂혀 있었습니다.

    또한 핸드폰 배경화면 가득 채운 반려견,
    반려묘 그리고 가족들의 사진들..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결국 법정에서 나오는 순간 저 혼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마 저도 저지만,
    다른 분들도 서로의 얼굴과 모습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다만 다른 분들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울지는 않으시더라고요.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저와 같은 사연을 가지신
    자영업자이셨습니다.

    그 무거운 법원을 나오는데..
    참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른 한쪽의 법정에선 경매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줄을 서 계셨고, 바깥에선
    전세 사기 관련 피해자분들이 울먹이며 기다리시고..

    또 다른 법정에선
    사기, 강도, 폭력, 횡령 등의 피의자들이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법원이라는 공간 전체가
    거대한 슬픔의 소용돌이 같았습니다.


    자영업이라는 지독한 굴레,
    그리고 망가진 몸

    돌이켜보면
    지난 2~3년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범죄자 잡아보겠다고 법원도 여러 번 다녀오고,
    보이스피싱을 당해 경찰서도 여러 번
    들락날락했습니다.

    상대방의 인성에 대해 바닥이란 바닥은
    다 겪어보았고, 사기 쳐놓고 유튜브로 당당하게
    강의 팔이 하는 쓰레기 같은 놈들도 많이 겪었습니다.

    자영업은 참 회사원일 때보다도 바쁘고, 민감하고,
    특이하고,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잔인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 시절 극도의 스트레스로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시력도 많이 떨어졌지요.

    안경점에서도 신경 이상이 생긴 것 같다며 안과며
    신경과며 다 가보라고 권할 정도였으니..
    참 암담했습니다.


    💡 10개월이 지난 지금, 다시 다짐을 읽으며

    당시 글의 마지막에 저는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IMF 때보다도 안 좋은 경기라고 하시면서도
    법률사무소에는 밀린 서류들이 참 많더라구요.
    모순이라고 해야 하나?

    신용이 돌아오는 데는 10년 정도가 걸릴 거라고 하시고. 하지만 다시 0부터 잘 만들어가야겠죠.”

    이 글을 쓰고 10개월이 흐른 2026년 지금,
    저는 약속대로 다시 0부터 차근차근
    제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당시 카페에서 저에게 응원 댓글을 주셨던
    수많은 사장님들의 온기를 잊지 못합니다.

    그때의 다짐을 잃지 않고,
    이 풀숲에서 다시 한번 힘차게 나아가보려 합니다.
    다 같이 다시 화이팅입니다!


  • 70억 매출 패션 디자이너의 개인파산 생존기: 인생의 바닥에서 다시 0부터

    ============================

    안녕하세요. 반딧불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제 인생의 작은 아지트이자,

    다시 일어서기 위한 기록을 담는

    ‘반딧불이 풀숲’입니다.

    ============================

    70억 매출을 찍고 파산선고를 받기까지,
    세상 어디에도 차마 꺼내놓지 못했던 비밀들을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숲에 외치듯 털어놓는 공간입니다.

    이 기록은 지금으로부터 약 10개월 전인
    2025년 9월 9일 아침,
    제 인생의 모든 영광을 뒤로하고 법원으로
    파산선고를 받러 가던 날, 자영업자를 위한 카페인
    “아프니까 사장이다 카페”에
    심경을 털어놓았던 제 첫 독백에서 시작됩니다.

    그날의 철저한 절망과 다짐을 잊지 않기 위해,
    2026년 7월의 오늘,
    제 풀숲에 글을 다시 깊게 박아둡니다.


    한우물 20년, 70억 매출 뒤에
    찾아온 잔인한 현실

    당시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저는 정말 법원으로
    파산선고를 받으러 가던 길 위에 있었습니다.
    의류업이라는 한우물만 판 지 거의 20년이었습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위기 속에서도 악착같이
    잘 견뎠지만, 코로나가 끝나고 모두가 기대했던 경기는 오히려 침체 상태로 깊게 빠져들었습니다.

    돌아온 것은 수많은 거래처의 연쇄 부도와 야반도주, 보이스피싱과 사기…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잔인한 현실뿐이었습니다.

    저는 고가의 브랜드 제품을 생산하고 납품했기에,
    원가만 해도 장당 10만 원이 넘는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한순간에 무너진 시장에서
    결국 논란의 소금빵보다도 저렴한 금액에
    눈물을 머금고 땡처리를 해야 했고,
    일부는 기부로 처분해야 했습니다.

    대신 떠안은 막대한 부채로 인해 세금도 제때 내지 못하게 되었고, 지독한 돌려막기에 한계가 오더니
    저 역시도


    ‘아.. 이제 나를 정말 멈춰야 되나?’


    하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더군요.
    주위에서는 회생을 하는 게 낫지 않냐고 권유했지만, 밀린 국세와 사업 경비로 쓰인 카드값의 무게로 인해 저는 결국 ‘파산’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약 3개월에 걸쳐 파산 서류를 준비하는 동안
    정말 많이도 울었습니다.

    내 자신을 때려가며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야 살아야 한다”며

    밤마다 울부짖었습니다.
    주위에서는 같이 교회를 다니자, 절을 다니자고
    종교를 권했지만, 저는 그 어떤 종교적 도움 없이 오롯이 제 두 발로 버텨내며 법원으로 향했습니다.

    결국 제 분신 같았던 자동차는 공매로 넘어갔고,
    평생의 일궈온 아파트 역시 국세 체납으로 압류되어
    경매 절차를 밟게 되었습니다.


    폐업하면서 모든 걸 내려놓기로 결심했지만,
    파산 과정이 결코 짧지 않다 보니 참 생각이 많아지는 나날이었습니다.

    ‘내가 과연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이젠 내 명의의 집이 아닌 이 좁은 집에서 내가 잘 케어할 수 있을까?’

    당시에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답이었지만,
    그럼에도 저는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폐업 후 10개월,
    바닥에서 배운 자영업의
    피눈물 나는 교훈

    그 지독했던 파산선고 이후 지난 10개월 동안,
    저는 참 바쁘게 버텨왔습니다.
    폐업 신고 후 제일 먼저 내일배움카드를 만들었습니다.

    ‘훈련’이라는 이름 하에 예전엔 관심도 없던
    유튜브 교육과 마케팅 교육을 들었습니다.

    전에 사업을 했을 땐 마케팅을 따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알아서 다들 저를 찾아와주셨는데,
    이제는 다시 0부터 시작하는 법을 철저하게 배우고 있습니다.

    한 번도 쉬지 못하고 달렸으니 1년 정도는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는 쉼의 시간을 가져보라는
    주위의 조언에 따라,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20년 가까이 개인사업자로서 최고세율로
    세금까지 내보고, 결국 바닥까지 무너지며 뼈저리게
    느낀 점은 딱 이 몇 가지였습니다.


    💡70억 매출을 찍고 무너지며 배운 자영업 교훈 8가지

    1. 돈이 있는 곳엔 언제나 사기꾼이 꼬인다.
    2. 세무사도, 직원도 절대 믿지 말라.
      누락된 세금 자료가 있는지 직접 확인할 것.
    3. 사장 부재는 금물이다.
      사무실 자리를 절대 비우지 말 것.
    4. 재고 관리에 충실하라.
      직원에게만 절대 전적으로 맡기지 말 것.
    5. 사업이 잘돼도 남에게 말하지 말고,
      안돼도 말하지 말라. 입을 무겁게 해야 한다.
    6. 친분이 어떠하든, 동업은 절대 하지 말라.
      개인사업자로든 무엇으로든 동업은
      파멸의 지름길이다.
    7. 매출이 일정 수준 이상 올랐을 땐
      반드시 법인사업자로 전환해서 리스크를
      분산해라.
    8. 마케팅비를 줄이고 싶고 글을 잘 쓴다면,
      스레드(Threads)나 블로그 등 SNS를 통한
      무료 홍보를 필사적으로 노릴 것.

    인생의 바닥에서 다시 페달을 밟다

    개인사업자로서 정상의 자리까지 가봤지만,
    거래처의 배신으로 한순간에 무너지니 나름 건강했던 정신마저 완전히 혼미해지더군요.

    공황장애는 더욱 거세게 밀려왔고,
    장염에 식도염까지 겹쳐 무언갈 먹으면 다 토해내느라 원치 않는 억지 다이어트를 하며 제 의지와 상관없이 몸도 완전히 망가졌었습니다.

    마인드 컨트롤, 릴렉스…

    이런 부드러운 단어들은
    ‘다 개나 줘버려라’라고 할 정도로 제 몸과 마음은 심각한 만신창이 상태였습니다.

    그 지독한 고통의 시절 속에서 저를 구원해 준 것은
    오직 ‘자전거’ 하나였습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목을 조여올 때마다,
    밤마다 자전거를 타며 여러 도시의 한적한 길을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뛰는 체력은 도저히 안 돼서 선택한 자전거가,
    지난 잔인한 시간들을 버텨내는 데 정말 위대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혹시 지금 이 순간에도 회생이나 파산을 준비하며
    사기꾼 브로커들에게 속고 계시는 사장님들이 있다면,

    반드시 ‘법원 근처에 진짜 오프라인 사무실이 있는 곳’에서 진행하시라는 당부도 꼭 전하고 싶습니다.
    브로커들에게 당하면 벼랑 끝에서
    한 번 더 추락하게 됩니다.

    바닥을 찍어야만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저는 지난 10개월을 잘 견디고 이겨내 왔습니다.

    2026년 현재, 저는 인생의 최저점에서
    다시 0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전국의 모든 사장님들, 부디 버텨내시고 힘내세요.